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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2/30 예수가 외친 '하느님 나라'의 뜻(하) (1)
- 2008/12/30 예수가 외친 '하느님 나라'의 뜻(상)
- 2008/12/29 예수는 어떤 평화를 생각했을까
<신학비평 주간 > 송기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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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느님 나라의 종교적 의미
예수의 하느님나라가 지닌 종교적 의미는 모든 민중이 온갖 종교지배이데올로기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서, 그것의 주체가 되는 세계를 의미한다.
예수가 가장 날카롭게 대들었던 대상은 유대교의 지배이데올로기였다. 예수는 유대교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유대교가 성전종교로 굳어지면서 여러 가지 지배이데올로기로써 민중을 억누르고 짓밟게 되었을 때, 그는 거기에 도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대교의 권력중심이 예루살렘성전중심체제로 모아지면서 먼저 내놓은 이데올로기는, 하느님은 예루살렘성전에만 있으므로 여기에 와야 비로소 하느님께 속죄제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체제의 실세들이 하느님을 독점해서 세도를 부리고 이권을 챙기자는 수작이었다. 초월의 하느님이 어떻게 한정된 공간에 갇힐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는 이 종교지배이데올로기에 도전했다. "하느님께서는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예배를 드리는 곳에는 그 어디에도 계신다."(요한 4 : 23-24) 이 말은 하느님을 예루살렘성전으로부터 풀어놓으려는 하나의 '하느님해방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신에 대한 이 해방선언은 동시에 유대교 지도자들의 착취에 대한 도전과 저항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사람들[민중]이 하느님께 속죄하기 위해서는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야 하는데, 그때 반드시 바쳐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양과 비둘기와 같은 제물이다. 그것은 꼭 깨끗한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의 결정권은 사제가 가졌다. 깨끗한 제물이라도 사제가 불결하다고 판정하면, '깨끗한 제물'로 다시 사야했다. 그리고 제물을 사려면 성전에서 쓸 수 있는 돈으로 바꿔야 한다. 환전상은 차액을 남겨서 사제와 그 이득을 나누어 가진다. 이 짓들은 모두 민중을 착취하는 수단의 하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성전의 대사제는 이스라엘의 최고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을 손아귀에 넣고 행정권과 사법권을 행사했다. 또한 성전체제를 지탱하기 위한 세금징수권도 가졌다. 이스라엘사람들에게는 소득의 10분의 1을 성전세로 바쳐야 할 의무가 부과되었다. 또한 대사제에게는 이스라엘사람들의 동원권도 가졌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적어도 한 해 한 번씩 예루살렘성전에 참배해야 했다. 이스라엘 민중들이 이들에게 얼마나 억눌리고 빼앗겼는가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예수가 예루살렘성전의 실세들에게 맞서고, 예루살렘성전의 '숙청[파괴]사건]을 일으킨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또한 유대교가 이스라엘 민중들을 억누르는 데 사용했던 지배이데올로기는 '율법'이었다. 율법의 핵심은 '안식일법'이다. 안식일법이란 안식일을 어떻게 해야 잘 지킬 수 있느냐에 관한 법인데, 여기에는 무려 250조항이나 있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어느 조항 하나만 어겨도 죽을 수 있을 만큼 엄격한 법이었다. 안식일에는 병을 고쳐서도 안 되고, 물건을 옮겨서도 안 된다. 남의 손에서 무엇을 가져가서도 안 된다. 자선이나 구걸조차 금하는 것이다. 물론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안식일 법을 지키려면 적어도 하루 밥 한 끼는 걱정이 없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런데 유대교의 집권자들은 안식일법을 지킬 수 없는 까닭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안식일 법을 어기면 무조건 '죄인'으로 몰았다. 그들은 안식일법을 그물처럼 쳐놓고서 거기에 민중이 걸려들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이처럼 안식일법이 민중을 얽어매는 것을 보고서 예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지 않다. 사람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28). 이것은 예수의 '인간선언'이며, '인권선언'이다. 이 선언에서 '안식일'은 '지배이데올로기'로, '사람'은 '민중'으로 바꿔 읽으면, "모든 종교이데올로기는 민중을 위해서 있다. 민중은 종교이데올로기의 주인이다."
그리고 유대의 종교지배이데올로기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정결법'이다. 본디 이스라엘의 정결법은 몸을 깨끗하게 하고 옷을 깨끗하게 입으라는 따위 아주 좋은 전통의 위생법이었다. 그리고 정결법에는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는 방법까지 규정되어 있다. 문제는 예수 시대에 이 정결법이 민중을 얽어매는 지배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이다.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도 정결법 위반이었다. 여성의 '생리'가 정결법을 어긴다고 해서, 여성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구실로 삼기도 했다. 정결법은 생태적으로 여성을 '사람'이 될 수 없게 했다.
예수 시대에는 안식일법이나 정결법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양치기들은 빈들에서 양떼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안식일 법을 지킬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몸에는 언제나 역겨운 냄새가 배어 있어서 정결법 역시 지킬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종교지배자들은 그들의 생활이나 생존의 조건은 전혀 배려하지 않은 채, 그들을 무조건 '죄인'으로 몰았던 것이다.
한번은 율법을 연구하는 율법학자들과 율법을 잘 지킨다는 바리사이파사람들이 예수에게 항의한 적이 있었다. "어째서 당신의 제자들은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습니까?" 그러자 예수가 대들었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이 먹는 음식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온 것들, 이를테면 살인, 도둑질, 간음, 탐욕, 사기, 질투, 모독 따위라는 것이다. 전통을 지킨다는 구실로 하느님의 계율을 어기는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을 예수가 날카롭게 꼬집은 것이다. 예수가 바리사이파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악행을 보고, "위선자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회칠한 무덤 같은 놈들아! 화를 입어라."고 악담과 저주를 퍼부었는데, 이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예수가 '율법'에 도전한 것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약자[민중]을 보호하는 율법의 기본정신을 어기고 오히려 율법을 민중을 옥죄는 지배이데올로기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히브리사람들의 성서[구약성서]에 나타난 율법의 기본정신은 약한 계층을 보호하는 데 있었으며, 특히 안식일법의 기원은 본래 '일꾼들의 휴식'에 있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예수의 하느님나라가 지닌 종교적 의미는 "하느님은 예루살렘성전 안에만 계신다." "율법[안식일법과 정결법]은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따위의 종교지배이데올로기에 예속된 민중이 그 이데올로기의 주체가 되는 세계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이 나라의 실현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성전의 실세들에게 대들었던 것이다.
5. 그러므로
예수의 하느님나라는 그때 이스라엘사람들이 정치 쪽의 억눌림에서, 경제 쪽의 착취에서, 종교지배이데올로기 쪽의 예속에서 벗어나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를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 인간화가 실현된 세계가 다름 아닌 예수가 외친 하느님나라의 본뜻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가 예수가 바라던 하느님나라이며, 바로 이 점에 예수의 하느님나라가 지니는 오늘의 참 뜻이 있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사람답게 살고 싶어 한다. 오늘의 비인간화세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예수의 하느님나라는 그만큼 보편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묻자. 한국 그리스도교와 그 교회는 예수의 하느님나라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정치적으로, 약한 나라들을 '악의 축'으로 몰아 침략- 정복을 일삼는 아메리카제국의 세계패권주의를 찬양하고, 그들의 뜻을 따라 비민주-반통일로 역행하는 한국보수정권을 뒷바라지하고, 아직도 반공주의에 사로잡혀 겨레의 자주평화통일을 반대하고,「뉴라이트」(한국의 네오콘)의 중심에 서서「기독교사회책임」이나「기독당」을 만들어 '종교권력화'를 노리고, 생명권을 지키려는 다중의 평화로운 "촛불놀이시위"를 반대하는 보수교회집단들, 그들은 인간화를 지향하는 예수의 하느님나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게 틀림없다.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시장경제체제로 하여 빚어진 소유의 불균등(양극화)을 낳아, 가난한 계층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사람노릇'조차 못하게 하는 '돈 제일주의'에 앞장서서, '마음의 가난'(마태 5:1)을 빙자한 청부(淸富)론으로 교인들을 호도하여 치부(致富)가 곧 구원이라고 믿게 하는 따위, 교회를 물신숭배(物神崇拜)의 체제로 만드는 보수교회집단들, 그리고 종교적으로, 케케묵은 근본주의교리로써 사람들의 머리를 틀어쥐고, 교회성장제일주의를 앞세워 교인들을 휘두르고, 말씀과 권위를 얹어 헌금과 복은 비례한다고 역설함으로써 교회재정을 불리고, 그리스도교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여 나라 밖까지 나가 '공격적 선교'를 일삼는 보수교회집단들, 이들의 온갖 반예수적 행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예수의 하느님나라와는 무관한 게 분명하다. 또한 예수가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위선과 못된 짓거리에 대해서 날카롭게 꾸짖으면서 퍼부었던 악담과 저주에서, 오늘의 한국 교회지도자들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의 보수그리스도교와 그 교회에는 역사의 예수가 바라던 하느님나라는 없는 성 싶다.
만일 오늘의 한국교회가 예수의 하느님나라를 실현하려는 의지라도 있다 면, 그 자체를 송두리째 뒤엎는 변혁을 거쳐야 할 터인데 그게 가능할까? 혹여 예수의 하느님나라가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된다면, 오늘의 한국그리스도교는 자기해체의 길로 나갈 수밖에 없을 터인데, 그건 더더욱 불가능하지 않을까? 역사의 예수와 무관한 한국의 '그리스도교왕국과 그 제왕들과 백성들',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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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득 교수는 연세대학교와 한국신학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목원대하교 신학과 조직신학교수를 거쳤다.(1999) 지금은『신학비평』(계간) 주간으로 있으면서, 그동안 순천대학교 철학과에서「예수의 사회적 휴머니즘」을 강의했으며, 지난 학기에는 호남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역사의 예수는 누구인가」를 생애 마지막 강의로서 했다. 그는 인간화를 틀로 삼아 그리스도교를 비판하고 있으며, 역사의 예수에게서 그리스도교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인간』,『예수와 인간화』,『사람다움과 신학하기』,『그리스도교신학과 인간해방』, 『하느님의 두 아들』,『역사의 예수는 누구인가』(강의노트) 따위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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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로 2009/02/24 23:45
안녕하세요. 송기득 주간님. 기독교사상에서 주간님의 신학 글을 읽으면서 예수의 하느님나라 복음이 얼마나 사회의식이 있는 말씀들인지 알았습니다.감사드립니다.
<신학비평 주간 > 송기득
1. 첫머리에
역사의 예수는 요한 세례자가 헤로데왕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갈릴래아로 달려가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라"고 외쳤다.(마르코 1 :14-15) 이것은, 그의 스승 요한 세례자가 빈들에서 외쳤던 소리와 같은 것으로, 요한이 벌였던 '회개운동'(민족정화운동)의 계승을 의미한다. 마태복음서의 저자는 요한의 메시지를 "빈들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표현했다.(마태오 3 : 3) '빈들'이 민중의 현장을 상징하는 말이라면, '빈들의 소리'는 바로 '민중의 소리'를 가리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외친 요한이나 예수는 바로 민중의 소리를 대변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요한이나 예수의 하느님나라는 '민중의 나라'였다. 예수의 민중은 물론 예수 자신이 간절히 바랐던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을 뜻했을까?
'하느님의 나라'란 말은 "하느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뜻한다. 여기에서 나라의 본뜻은 '영토'에 있지 않고, '주권'에 있다. 하느님에게 주권이 있는 나라, 그것이 곧 하느님의 나라이다. 예수 시대에는 로마 황제가 절대주권을 휘두르고 있던 때라, 이스라엘나라를 로마황제 대신에 하느님이 직접 다스려줄 것을 바랐다. '야훼' 하느님은 로마제국의 황제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인 권력으로써 이스라엘을 정의롭게 다스려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예수 세미나』의 학자들이 예수의 '하느님나라'를 "하느님의 제국주의적 통치"로 옮긴 데는 일리가 있다.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서 온갖 고난을 겪었던 이스라엘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제국주의적인 절대통치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하느님나라는 하느님의 제국주의적 통치를 전제로 한 것은 아니다. 예수는 유대교도로서 마땅히 '야훼의 절대통치'를 바랐을 것이지만, 그가 한번도 하느님을 '야훼'라고 부르지 않고 '아버지'(실은 '어버이'이다)라고만 부른 것을 보면, 그의 '하느님의 나라'는 사실상 이스라엘나라만을 편드는 '야훼의 나라'가 아니고, 모든 사람[다중]을 사랑하는 '어버이의 나라'였음이 확실하다. 결코 제국주의적-전체주의적 국가일 수가 없는 것이다. 요한이나 예수가 외친 하느님의 나라는 '민중의 나라'를 가리킨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예수가 외친 하느님의 나라 곧 민중의 나라는 그의 민중편향성으로 보아, 우선 민중[다중(多衆)]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를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예수의 하느님나라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나는 '유물론적 접근방법'이 가장 알맞다고 생각한다. 유물론적 접근방법은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절실한 문제를 다루는" 해석방법을 의미한다. 이것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방법과 비슷하다. 예수의 하느님나라를 유물론적 접근방법에 따라 이해하고 해석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를 띄게 될까?
우리의 삶과 역사에서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절실한 문제는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집약될 수 있다. 예수 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의 하느님나라의 참뜻을 올바로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치, 경제, 종교이데올로기 쪽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알맞은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서의 저자들은 이른바「악마의 유혹이야기」에서 예수가 이스라엘의 살길을 찾으려고 빈들에서 고뇌했던 주제가 바로 정치, 경제, 종교이데올로기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예수의 하느님나라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방법에 힘이 실리는 것을 알게 된다.
2. 하느님 나라의 정치적 의미
예수가 외친 '하느님나라'는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이 사실을 보다 뚜렷이 밝히려면, 먼저 예수 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알 필요가 있다. 예수 시대는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으며, 그것으로 하여 이스라엘공동체는 깡그리 망가져 있었다. 이런 사회-역사적 상황에서 외쳐진 예수의 하느님나라는 어떤 세계였을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민족-민중이 로마제국의 지배와 착취로부터 그리고 그 대리통치자였던 헤로데정권과 예루살렘성전 권력계층의 억압과 수탈로부터 벗어나서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아울러 망가진 이스라엘공동체를 회복하는 세계를 일컫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것이 하느님의 주권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였다. 여기에는 사람은 결코 왕권에 의해서 지배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하느님에 의해서만 다스려져야 한다는 생각이 깊이 깔려 있다.
흔히 예수는 로마제국이나 그 대리 통치자들의 탄압이나 착취를 모른 체 했거나 무시해서, 거기에 대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형틀에서 '정치범'으로 처형당한 것은, 기껏해야 '민중소요죄' 정도로 짐작해서, 예수야말로 참으로 '억울하게'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추리가 가능한 것은 성서에는 도대체 예수의 십자가처형에 대한 뚜렷한 이유가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복음서를 전공한 '신약신학자'는 아니지만, 예수가 단순히 '민중소요죄'로 억울하게 죽었다는 데 동의하기 어렵다. 예수가 로마제국에 항거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방 사람들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이스라엘 민족의 집권자로 알려진 사람들이] 주인으로 군림해서 이 민족을 강제로 지배하고, 고관들이란 녀석들은 권력으로 민중을 마구 내리누르면서 세도를 부린다....그래서는 결코 안 된다."(참고 마르 10:42-43) 이 구절에서 '이방사람의 통치자'란 바로 로마제국의 통치자를 가리키며, '고관들'이란 바로 로마제국의 지배자들과 그 세력에 빌붙어서 민중을 수탈하는 그 대리지배계층을 가리키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리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에는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그 따위 세력은 단호하게 몰아내야 한다."는 예수의 의연한 결의가 담겨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의 이 말은, 예수가 침략자의 통치 권력과 그 앞잡이들의 지배세력을 부정-거부하고 거기에 맞대 싸워서, 그 지배세력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과 민중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으로 읽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예수가 로마제국의 지배 권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내놓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나타내는 말이 있다. 예수가, 사람이란 하느님의 주권에만 복종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그러기에 민중을 탄압하고 수탈한 세력에 대해서는 당연히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 대목이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마태 22:15-22)라는 말이 그것이다. 헤로데당 사람들이 예수에게 올가미를 씌워 로마 당국에 넘기려는 구실을 삼으려고,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 그렇지 않는 것이 옳으냐?"고 예수에게 물었을 때, 예수는 이들의 잔악함을 알고서 세금으로 내는 돈을 보이라고 하면서, 이 '데나리온'에 새겨진 상(像)이 누구냐고 물었다. [사실 그 당시에 사용되었던 화폐에는 황제의 상은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러자 이들이 "황제이다"라고 대답했을 때, 예수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고 말했다.
흔히 이 말을, 사람은 황제와 하느님에게 동시에 복종하라는 뜻으로 풀이하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해석이다. 이스라엘의 전통신앙에서는 황제와 신의 대비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아무리 위대한 황제라 할지라도 그는 하느님의 지배 아래 있다. 악마의 세력 또한 마찬가지이다. "너희는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루가 16 : 13)는 예수의 타이름이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다"는 소유사상의 전통이 있다. 이것은 "모든 것은 민중의 것이다"는 생각을 종교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신에게만 드릴 수 있게끔 관례화되었다. '황제의 것'이 따로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말한 초점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드리라는 데 있는 것이지, 황제에게 드리라는 데 있지 않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니, 황제에게 드릴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들었던 사람들은 바로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민중이었다. 이들은 로마황제가 얼마나 포악스러운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것을 황제에게 돌리라는 것은 오히려 황제의 폭정에 항거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황제에게 돌릴 것은 '항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해방을 갈망하는 사람들[민중]에게는 로마황제의 왕관을 내리치는 쇠망치와 같았다고, 입센은 풀이한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이 선언이야말로 로마제국에 무력으로 항거했던 젤롯당다운 혁명선언이었다고 덧붙였다. 예수의 선언은 분명히 로마제국에 항거하는 '반체제적 혁명선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편 성서에는 예수가 로마제국의 대리통치자였던 헤로데왕에게 세차게 도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루가 13 : 31-34) 예수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에게 와서 말했다.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가서 그 여우[같은 놈]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나는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나의 길을 가야하겠다." 이 말에는 헤로데왕권에 대한 예수의 강한 반발과 저항의지가 들어 있다. 또한 우리는 예수가 로마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예루살렘성전체제와 그 지배자들에게도 강하게 대들었던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가 선언한 '하느님나라'의 정치적인 의미는 로마의 식민지배권력과 여기에 빌붙어 동족을 탄압하는 헤로데의 괴뢰정권이나 예루살렘성전의 실세들의 탄압과 수탈로부터 이스라엘 민족과 민중이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리고, 깡그리 망가진 이스라엘공동체를 회복해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실현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가 이러한 새로운 세계가 다가올 것을 외쳤을 때 집권자들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예수가 마침내 지배자들에 의해서 정치범에게 국한하는 '십자가형틀'에서 처형당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3. 하느님 나라의 경제적 의미
예수의 하느님나라의 경제적 의미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모든 사람들이 '힘닿는 대로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가지는 세계'를 뜻한다. 이 사실을 아주 뚜렷하게 드러낸 이야기가 있다.「포도원 품꾼의 이야기」(마태 20 : 1-15)가 그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고 말하면서, 그의 하느님나라가 지닌 경제적 의미를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뚜렷이 밝히고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품꾼을 고용하려고 아침 일찍이 일감을 기다리고 있는 저자거리(인력시장)에 나갔다. 그는 품꾼들과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아홉 시쯤 나가서 일감이 없어 서성거리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했다. 주인은 열두 시쯤에도 그렇게 하고, 오후 세 시쯤에도, 또 오후 다섯 시쯤에도 그렇게 했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맨 나중에 온 품꾼부터 차례로 불러서 약속한 대로 한 데나리온씩 주었다. 그러자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일한 사람은 더 받을 줄 알았다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주인에게 항의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찌는 더위 속에서 땀 흘려 일했는데 어째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과 똑같이 주는 것이오." 이 항의는 정당하다. 자본주의경제체제에서는 일꾼이 일한 만큼 품삯을 받는 것은 경제정의에 속한다.
그런데 성서에는 포도원 주인이 '불공평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포도원 주인이 준 한 데나리온은 실은 단순한 '품삯'(임금)이 아니라, 적어도 하루를 살 수 있는 '생계비'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한 데나리온은 하루를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생계비[생존비]였다. 일을 많이 하든 적게 하든, 아니 병이 났거나 일감이 없어서 일을 못하든, 사람은 적어도 하루를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사회주의경제학에서는 임금을 '생계비'로 생각해야 한다는 이론이 있다고 들었다. 이제「포도원 품꾼의 이야기」에서 드러난 경제 질서를 한마디로 간추려 정리하면, "힘닿는 대로 일하고 필요(수요)에 따라 나누어 가지는" 경제 질서이다. 이러한 경제 질서를 시쳇말로는 '공산주의'라 부른다.
힘닿는 대로 일하고 수요에 따라 분배하는 경제 질서를 공산주의라고 한다면, 그 기원은 역사의 예수에게 있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그것은 처음 그리스도교공동체에서 잠시나마 실천되었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지내면서 모든 물건을공동으로소유하고… 모든사람에게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습니다."(사도 2:44-45). "믿는 무리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누구 하나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했습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갖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사도 4:32-35)
남아메리카의 해방신학자 호세 미란다는「기독교는 공산주의이다」는 논문에서, 그리스도교가 내세운 경제의 이상은 '힘닿는 대로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가지는' 데 있다고 지적하면서, 만일 이러한 경제 질서를 '공산주의'라고 부른다면, 그리스도교야말로 공산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더욱 놀라운 말을 했다. 공산주의가 그리스도교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가 공산주의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보다 공산주의에 보편적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그런데 호세 미란다는 '그리스도교'를 '역사의 예수'로 바꿔서 공산주의와 대비시켰었어야 옳았다. 민일 공산주의라는 말이 거슬린다면, 예수의 '나눔의 공동체'란 말로 바꿔 읽으면 된다. '공산주의의 이념'은 결코 공산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국가들의 독점물이 아니다.
예수의 하느님나라의 경제적 의미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편향성에서도 드러난다. 예수는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저희 것이다."(마태 5:1) 하느님의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소유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이 골고루 먹고 살 수 있는 세계이며, 그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이 주체로서 스스로 열어가는 세계이다. 여기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시체말로 민중이고 다중(多衆)이다.
그러기에 예수가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는 말했다. "부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 그러나 예수는 가진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데 나와 함께 나서자는 것이다.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 투신하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가난의 의식화'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우리는 역사의 예수가 '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그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거기에 도전할 것을 명시한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준 비유가 있다.「달란트의 비유」(마태 25 : 14-30)와「열 므나의 비유」(루가 19 : 11-27)가 그것이다. 이 두 비유는 예수의 하느님나라와 그 운동이 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거기에 치열하게 항거할 것을 예시한다. 나는 우리에게 익숙한「달란트의 비유」만을 보기로 들겠다.
달란트 비유에 따르면, 어떤 큰 주인[재벌]이 여행을 떠나면서 그의 세 종[가신]에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기면서 돈을 많이 벌라고 지시한다. 한 달란트는 한 노동자가 15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큰 돈이다. (1달란트는 1만 데나리온인데, 그 때 노동자의 하루 품삯은 1데나리온이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가신이나 두 달란트를 받은 가신은 배를 남겨서 주인에게 바쳤다. 주인은 돈을 배나 남긴 두 가신에게,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 했다!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가신은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말했다. "주인님, 주인님은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는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는 데서 모으는 줄 알고, 무서워서 땅에 묻어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그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 돈을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맡겨서 이자라도 받았어야 하지 않았겠느냐?"고 나무라면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가신에게 주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없는 사람에게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이 쓸모없는 종을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예수의 이「달란트의 비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흔히 말하는 대로 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를 정당화하는 가르침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예수의 하느님나라운동의 실상 뿐만 아니라,「포도원 품꾼의 이야기」에 나타난 예수의 평등경제원리에 정면으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달란트 비유의 배경에는 '돈이 제일이다'는 맘몬주의의 우상이 깔려 있다. 예수는 하느님과 돈을 함께 섬기지 말라고 경고했다.(루가 16 : 13) 문제는 '주인'이나 '종들'이 돈을 버는 방법에 있다. 예수 당시 재벌이나 그 가신들은 자본을 불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악랄한 방법을 다 동원했다. 돈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받거나, 빚을 갚지 못하는 농민들의 땅을 빼앗는 짓 따위, 온갖 착취와 약탈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무한한 이윤추구와 자본축적에 열을 올린 '주인'은 온갖 착취와 약탈을 일삼았던 그의 가신들을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고 부르면서, 더 많은 일을 맡기겠다는 것이다. 더 많은 착취와 약탈을 자행하라는 것이다. 이런 경제체제를 예수가 용납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돈을 남기지 않는 가신에 대해서 주인의 취한 태도는 어떠했는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하면서 그 돈을 빼앗아 더 많이 가진 가신에게 주었다. 그리고 돈을 그대로 가져온 가신에게 혹독한 처벌을 내린다.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주인은 말했다.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없는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부익부-빈익빈, 양극화의 조장이다.
그런데 예수의 달란트 비유를 '영적으로' 해석해서, 하느님께서 개인에게 맡겨준 사명과 재능을 최대로 발휘해서 성실하게 일하여 많은 업적을 내면, 큰 복을 받게 된다는 가르침으로 받아야 한다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예수의 코드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반자본주의시장경제에 대한 예수의 설명을, 어떻게 복을 받을 조건으로 풀거나, 심지어 예수가 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를 정당화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가. 문제는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이 '하느님'이나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고 보는 데 있다. 이것은 맘몬주의에 사로잡힌 제도권 신학자나 설교자들의 관점이다. 만일 그렇다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이럴 적에 하느님이나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거나 약탈하는, 그래서 부자를 더 부자 되게 하는 주체가 된다. 이것은 어불성설이다. 예수의 하느님은 돈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돈 없고 힘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하느님이다. 그러기에 이 비유의 '주인'은 맘몬주의의 우상을 섬기면서, 온갖 악랄한 수법을 동원해서 노동자나 농민을 수탈하는 악덕 대재벌이나 기업주들을 가리킨다는 것이 명백하다. 달란트 비유를 차라리 하느님나라를 널리 펴는데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와 책임을 최선을 다해서 수행하라는 뜻쯤으로 해석하면 좋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주인이 맡긴 돈을 땅에 묻었다가 그대로 돌려준 '악하고 게으른 종'의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악하고 게으른 종'은 처음에는 주인의 지시를 따랐지만, 나중에는 '주인'의 지시가 부당한 줄 알고 거부했으며, 마침내 목숨을 걸고 주인에게 항거했다. 그 결과 그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 슬피 울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악덕 기업주들에게 항거한 노동자들, 그 가운데서도 비정규직노동자들이나 외국인이주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운명을 너무나 잘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서 예수가 달란트 비유를 하느님나라에 비유한 까닭이 뚜렷하게 밝혀진다. 하느님나라는 맘몬주의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민중[다중]을 수탈하는 재벌이나 악덕기업주에게 항거해서 골고루 먹고 살 수 있는 '나눔의 공동체'를 이루어내는 세계이며,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내대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의 "달란트 비유"를,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극도의 비인간화를 조장하는 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에 대한 철저한 비판으로 읽어야 한다. 이 비유는 결코 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를 옹호하기 위한 변증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한국의 어느 극우보수논객은 신학자도 아닌 주제에 "예수는 자본주의자이다"고 공언하면서, 예수가 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의 원리를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한 반박논문이 없는 것을 보면, 도대체 한국에 참 신학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러므로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나라의 경제적 의미는, 모든 소유가 골고루 나누어지는 나눔의 세계,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도 없는 소유의 평등공동체가 이루어지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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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득 교수는 연세대학교와 한국신학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목원대하교 신학과 조직신학교수를 거쳤다.(1999) 지금은『신학비평』(계간) 주간으로 있으면서, 그동안 순천대학교 철학과에서「예수의 사회적 휴머니즘」을 강의했으며, 지난 학기에는 호남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역사의 예수는 누구인가」를 생애 마지막 강의로서 했다. 그는 인간화를 틀로 삼아 그리스도교를 비판하고 있으며, 역사의 예수에게서 그리스도교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인간』,『예수와 인간화』,『사람다움과 신학하기』,『그리스도교신학과 인간해방』, 『하느님의 두 아들』,『역사의 예수는 누구인가』(강의노트) 따위의 책을 썼다.
<신학비평 주간> 송기득
1.
우리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평화는 자주 다루면서도, '역사의 예수'가 생각한 평화는 별로 다루지 않고 지나치기 일쑤다. 그래서 차제에 나는, "그리스도교의 평화"에 관해서 말해달라는 편집실의 요청 대신에, "역사의 예수는 평화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에 관해서 짚어보려고 한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에서 실제로 살았던 '역사의 예수'와는 사뭇 다르다. 비록 성서의 저술의도에서 보면, '역사의 예수'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확실성이 떨어지므로, 역사의 예수가 생각했을 평화 또한 그만큼 개연성을 지녔다는 사실은 전제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예수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학문적인 정직성은 인정해야 마땅하다.
내가 여기에서 예수가 생각했을 평화를 말하는 데는, 예수의 평화사상이 남북의 평화통일이념을 실천하는 데 조금이나마 이바지하기를 바라서다.
2.
예수는 어떤 평화를 생각했을까?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내가 주는 평화는 이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14 : 27)고 말했다. "이 세상이 주는 평화"는 무엇을 가리키기에, 예수의 평화가 이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고 했을까? 이 사실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예수는 어떤 세상을 살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무릇 역사적 사실과 사건에 대한 이해에는 상관적-상황적 해석방법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로마제국의 식민통치 아래 살았다. 그의 나라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로 하여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온갖 고통을 겪어야 했다. 작은 봉기라도 일어나면 그 지역 사람들을 깡그리 몰살하거나 노예로 끌어갔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민족공동체는 거의 문어져버렸다. 세계패권주의를 지향한 로마제국의 식민지통치방식은 '칼'이었다. 로마제국은 칼의 힘으로써 세계를 재패하려했는데, 그것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이른바 '로마의 평화'(pax Romana)다. 칼의 힘으로써 세계의 평화를 이루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평화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전쟁만 없으면 '편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겉으로는 평화인 듯 보이지만, 안으로는 냉혹한 반목이 도사리고 있다. 약한 쪽에는 온갖 불의와 불평등에서 오는 수난이 그칠 날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평화는 진정한 평화일 수가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엔 아메리카제국이 '로마의 평화'를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방법은 그보다 더 악랄하다. 칼[핵무기]와 함께 돈[시장]으로 세계를 재패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라 부른다. 우리나라는 지금 남북 가릴 것 없이 아메리카제국의 패권주의에 시달리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 겨레의 평화통일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히브리[이스라엘]사람들은 일찍이 평화의 개념을 달리 했다.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평화가 아니라, "[야훼의] 정의가 실현된 상태"가 진정한 평화라는 것이다. 나라 안에서는 다윗이나 솔로몬과 같은 전체주의적 왕권체제에 의해서 온갖 괴로움을 겪어본 적이 있는, 그리고 나라 밖 힘센 나라들에게는 침략을 당하여 노예 살이에 시달려온 이스라엘민족에게는 정의가 실현된 상태인 평화사상은 너무나 당연하다. '[야훼(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된 상태', 이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샬롬'(Shalom)이라고 불렀다.
예수의 평화가 "이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고 했을 때, 아마도 그 평화는 '샬롬'을 가리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예수는 이스라엘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유대교도의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사람으로서 대접 받지 못한 가장 천한 계층(목수였거나 농민이었거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천민들이야말로 야훼의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세계를 더욱 바라지 않았겠는가.
3.
그러나 문제는 예수의 평화가 '샬롬'에 그쳤느냐에 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이 내세운 야훼의 정의는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에 바탕하고 있어서 철저한 배타성을 지니고 있다.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에 따르면, 이스라엘민족이 원주민을 침략하고 정복하는 것은 정의가 되고, 이스라엘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침략을 당해 정복을 당하면, 그것은 불의가 된다. 야훼의 정의 여부가 이스라엘민족을 중심으로 규정된다. 이것은 마치 파스칼이 그의 팡세(명상록)에서 "정의는 강 건너편에 있다." 고 말한 것과 흡사하다. 강 이 쪽의 우리 편은 무조건 정의이고, 강 건너 쪽 너희 편은 무조건 불의이다. 이스라엘민족이 하는 일은 모두 정의이고, 이스라엘민족이 아닌 쪽에서 하는 일은 모두 불의이다. 아울러 하느님 야훼는 이스라엘민족에게는 정의의 하느님이지만, 이스라엘민족에게 침략을 받은 원주민들에게는 불의의 하느님이 된다. 이러한 '야훼의 정의(正義)'는 이스라엘이 '야훼(하느님)의 이름'으로 다른 민족을 정복할 수 있는 침략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히브리족속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에 들어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실은 '지파동맹'이다)를 세우기까지 수많은 도성을 빼앗고 원주민을 도륙했는데, 그들에겐 이것이 바로 '샬롬'의 실천으로 정당화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이스라엘나라의 정복정책에서 그대로 들어나고 있다. 이스라엘이 1948년 나라를 세울 때 현지 팔레스타인들을 무력으로 쫓아내고 삶의 터전을 파괴했는데, 그 결과 지금은 약 400만 명의 팔레스타인들이 고향에서 추방되어 방황하다가, 유엔이 정해준 난민촌에 정착하여 겨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요즈음에는 경제제재초치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난민촌 둘레에 높은 분리장벽을 쌓고서, 서로의 왕래를 막음으로써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숨통을 끊어 스스로 굶어 죽게 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지금 세계는 팔레스타인들이 살고 있는 가자지구를 "지구상에 있는 가장 큰 감옥"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은 팔레스타인 말살정책은 아메리카제국이 뒤를 받쳐주고 있어서 가능하다. 이것이 '하느님의 선민'이라는 이스라엘사람들의 후손이 내세운 샬롬의 정체이다. 샬롬이란 미명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제국주의적 침탈은 로마제국이나 아메리카제국의 그것보다 훨씬 더 악랄하다는 것이 오늘의 정평이다. 이들의 샬롬을, 우리는 '이스라엘의 평화'(pax Israelis)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스라엘의 평화'가 히브리인들의 성서[구약]에 나타난 '야훼의 평화'라면, 예수가 이러한 평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예수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자명하다. 예수의 하느님은 "착한 사람의 논에도 비를 내리시고, 악한 사람의 논에도 비를 내시는"(마태 6 : 45)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어버이 하느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해방과 정의만을 편드는 편협한 '이스라엘의 평화'(샬롬)를 어찌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예수는 이스라엘의 전통으로 받은 야훼의 평화를, 이스라엘민족에게만 적용되는 평화가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 함께 적용할 수 있는 '인류공공의 평화'로 넓혔던 것이다. 처음 그리스도교는 실권을 잡기 전에는 한때 예수의 뜻을 이어 샬롬의 세계적인 공공성을 지향한 적이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라는 생각에 따른 것이다.(바울로) 예수는 그의 하느님 야훼를 한번도 '야훼'라고 부르지 않고, 다만 '아버지'(abba)라고만 불렀는데, 그것은 이른바 '야훼의 평화'에 대한 거부를 시사한지도 모른다.
4.
그렇다면 예수가 말하는 평화는 무엇이었을까? 요한복음서저자가 예수의 평화는 "이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헬레니즘에서 말하는 '마음의 평정'(ataraxia, apatheia)에 그 초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흔히 말하는 '내면의 평화' 곧 '마음의 평화'가 예수의 평화라는 것인데, 이것은 요한복음서의 평화사상이 헬레니즘의 신비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내가 너 안에, 네가 내 안에" 있는 하나임의 상태가 진정한 평화의 자리일 수 있다. 역사의 예수에 정통하고 있는 미국의 "예수 세미나"에서는 예수를 그리스의 견유(犬儒)학파 사람들과 비슷한 '떠돌이 현자'로 보는데, 만일 그렇다면 예수의 평화는 '개처럼' 자유롭게 사는 정신의 평화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가 가르친 '지혜'는 사회적 혁명이 골간을 이룬다는 사실이다.(크로산) 그리고 '마음의 평화'는 오늘날까지 그리스도교의 평화 곧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의 알짬으로 이해되고 있다.
우리가 역사의 예수에게 주목한다면, 예수가 생각한 평화는 '이스라엘의 평화'(샬롬)에 그치지 않고, 또한 요한복음서에서 말하는 '마음의 평화'만도 아닌 것이 확실하다. 예수는 그의 평화 사상을 따로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그것을 우선 '예수의 평화'(pax Jesu)라고 부르기로 한다.
5.
예수의 평화는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는 그것을 그의 하느님나라 메시지와 그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는 궁극에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세계를 뜻한다. 예수의 하느님나라를 그 때의 역사적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해석한다면, 정치적으로는 이스라엘민족이 로마제국과 그의 대리 통치자들(헤로데왕과 예루살렘성전의 지배자들)의 억압과 착취로부터 벗어나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세계를 가리키고, 경제적으로는 '힘닿는 대로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가지는' 경제적인 평등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세계를 가리키고, 종교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전통과 율법의 예속에서 벗어나 그 주체로서 살 수 있는 세계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침략으로 무너져버린 이스라엘공동체의 회복과 직결된다. 그것을 시체말로 나타내자면,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가 실현된 세계'와 다르지 않다. 진정한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가 실현된 세계, 그게 다름 아닌 예수가 외친 하느님의 나라의 골자이며, 예수가 바랐던 세계였다.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 예수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싸우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예수는 말했다.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 : 34) 루가복음서에는 "칼을 주러 왔다"는 말 대신에 "분열을 일으키려 왔다"(12 ;51)고 적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예수는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루가 12 : 49)고도 말한다. 이 말들은 사회개혁이나 역사변혁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팍스 로마나'나, '이스라엘의 평화', 그것은 모두 '예수의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따위 평화는 도리어 싸워야 할 대상이다. 예수는 그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게 다름 아닌 그가 벌인 '하느님나라운동'이다. 예수는 말했다. "하느님의 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힘을 쓰는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한다."(마태 11 : 12) 예수는 마침내 하느님나라운동으로 하여, 로마제국이 항로마투쟁에 나선 이스라엘의 '정치범'(국가범)에게만 적용했던 십자가형틀에서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생명평화결사'라는 말에서, 이러한 예수의 결의와 태도를 읽는다면 지나친 것일까?
6.
사람들은 흔히 예수를 '평화주의자'라고 말한다. 예수를 '무저항주의자'라고도 말한다. 예수는 "오른 편 뺨을 치러들면, 왼 편 뺨을 돌려대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이 말의 본뜻은 저항을 거부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비폭력의 저항'을 권유한데 있다. 돌려댄 외편 뺨을 차려면 왼편 손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유대나라에서는 관례상 왼손을 쓰는 것은 불법이다. 그래서 결국 상대의 오른 뺨을 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폭력을 쓰지 않고 저항하는 비폭력의 저항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준다고 하여라." 이 말은 로마군인들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데, 로마군인들이 이스라엘 사람을 붙들어 짐을 지우고 오리를 가자고 강요하면 십리까지도 가겠다고 말했을 때, 로마군인의 강요를 뿌리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오리 이상의 거리를 가면 그 당시 로마군법에 저촉이 됨으로, 로마군인이 짐 지우는 일을 스스로 포기하게 할 수 있다. 이것 또한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어서 스스로 폭력을 쓸 수 없게 만드는 '비폭력의 저항'의 한 방법이다.
그러나 예수의 저항방법이 비폭력의 저항에만 그쳤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보았듯이 예수는 스스로 하느님나라 곧 평화의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대들어 싸웠으며,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종용했다. 예수는 '평화의 세계'를 이루기 위한 철저한 저항자였다. 예수의 '성전숙청사건'이 그것을 단적으로 뒷받침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해방절인 '유월절'에 예루살렘성전 안으로 쳐들어가, 채찍을 휘둘러 제물(祭物)을 파는 사람들과 돈을 바꿔주는 사라들을 내리치고 그들의 상을 뒤집어엎었다. 하느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어떤 민중신학자는 이 사건을 '민중봉기'로까지 확대 해석한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도 예수의 혁명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는 예수가 폭력적인 저항방법을 정당화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저항하는 방법은 사건의 사안에 따라서 그 때 그때 선택-결정해야 하는 과제로 남겨두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독일 나치시대에 경건한 목사였던 신학자 본 훼퍼가 히틀러 암살에 가담했던 탓으로 처형되었는데, 그가 폭력에 호소해서 '살인행위'에 가담했던 일에 관해서 우리는 이러 쿵 저러 쿵 말할 게재가 아니다. 그가 폭력적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에 관해서는 본훼퍼 자신만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비폭력의 저항방법을 원칙으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하등의 이의가 없다.
그런데 비폭력의 저항은 폭력의 저항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목숨을 내댄 데는 차이가 없지만, 비폭력의 저항방법은 그가 당한 폭력에 대해서 많은 인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폭력의 저항방법은 엄청난 용기와 자신과 긍지를 가지게 한다. 함 석헌의 말마따나, 비폭력의 저항은 '이미 이겨놓고 하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비폭력적 저항은 '폭력'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항'(싸움) 그 자체에 초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예수를 빌어 '세계평화주의'를 함부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스도교가 처음 시작되면서 헬레니즘사상 특히 스토아철학의 세계시민주의의 영향을 받아 이른바 '사해동포주의'를 표방하고 나섰다.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딸과 아들로서, 하느님의 평화를 다 함께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공인을 받으면서 '로마의 평화'를 본받아, '그리스도교의 평화'를 내세우면서 세계 공공의 평화를 세계재패에 악용했다. 천주교나 개신교 할 것 없이, 그리스도교가 2,000년에 걸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죽인 사람의 숫자가 2억 이상으로 추산된다. 적대자들에게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인들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지금까지 세계평화를 망가뜨려온 주범이었다는 사실을 강변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람살상행위는 아직도 더욱 강화되고 있다. 아메리카제국은 그들의 국익을 중심으로 설정한 '악의 축'의 나라들에 대해 노골적인 침략-정복정책을 펴고 있는데, 이것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메리카제국의 패권주의를 뒷받침하고 있는 집단은, 바로 그리스도교 보수주의자들을 비롯한 다른 종교 보수주의자들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보수교회신앙인들은 한 술 더 떠서, 겨레의 평화통일을 거부하는 데 극우세력과 야합하고 있다. 북녘을 주적국가로 규정하고 이를 말살하려는 정복이데올로기인 국가보안법의 패지를 극력 반대하고 있는 것이 이를 실증한다. 오늘의 한국보수교회에는 세계의 평화는커녕 겨레의 평화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 사실이 요즈음에 와서 극명하게 들어나고 있다. 남북정상이 만나는 며칠 전에 이른바 '유력하다'는 국내외 한국인 보수극우목사 70명이 모여 남북정상회담에 사실상 반대하는 성명서를 냈다. 한국교회 그리스도교가 역사의 예수에게서 참된 하느님의 평화가 무엇인가를 배우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겨레의 자유와 평화통일을 기대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뀌어가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진정으로 남북의 평화통일과 세계의 평화를 이루는데 참여하려면, 예수에게서 평화의 참뜻을 배우고,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따르고, 나아가 독선-독단의 배타주의를 넘어서 다른 종교와 함께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7.
우리가 예수의 평화를 묻는 것은, 우리 겨레가 남북의 평화통일의 이념을 묻고 실현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예수의 평화는 우리 겨레의 평화통일 이념을 실현하는데 하나의 '전거'(典據, 패러다임)가 될 수 있다는 전제에서다. 예수는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평화의 세계 곧 하느님의 나라를 지향했다. 북녘은 인민들이 먹고 살만한 평등의 세계를 실현하고, 남녘은 민중들이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계를 실현해서, 마침내 통일된 평화의 나라를 이루어낸다면, 우리나라는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는 '역사의 기틀'이 되어, 인류사에 '동방의 빛'으로 크게 이바지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예수가 지향했던 '오늘의 하느님나라'가 아니겠는가?
남북평화통일의 실현은 우리가 오랜 세월 '분단모순'으로 하여 겪어온 민족적 수난을 값있게 승화시키는 역사적 과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진정한 평화의 나라,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힘쓰는 방법이야 어떻게 표출되든, 모든 반평화세력에 대한 저항활동에,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루가 10 : 27) 온몸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누구나, "하느님의 나라[평화의 나라]는 힘쓰는 사람이 차지한다."는 예수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생명평화결사』에서 내고 있는 격월간지『등불』(2007, 7-8)에 실린 것인데, 조금 보태고 손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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