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역사'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12/29 예수는 어떤 평화를 생각했을까
2008/12/29 10:06

예수는 어떤 평화를 생각했을까

<신학비평 주간> 송기득

1.
우리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평화는 자주 다루면서도, '역사의 예수'가 생각한 평화는 별로 다루지 않고 지나치기 일쑤다. 그래서 차제에 나는, "그리스도교의 평화"에 관해서 말해달라는 편집실의 요청 대신에, "역사의 예수는 평화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에 관해서 짚어보려고 한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에서 실제로 살았던 '역사의 예수'와는 사뭇 다르다. 비록 성서의 저술의도에서 보면, '역사의 예수'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확실성이 떨어지므로, 역사의 예수가 생각했을 평화 또한 그만큼 개연성을 지녔다는 사실은 전제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예수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학문적인 정직성은 인정해야 마땅하다.
내가 여기에서 예수가 생각했을 평화를 말하는 데는, 예수의 평화사상이 남북의 평화통일이념을 실천하는 데 조금이나마 이바지하기를 바라서다. 

2.
예수는 어떤 평화를 생각했을까?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내가 주는 평화는 이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14 : 27)고 말했다. "이 세상이 주는 평화"는 무엇을 가리키기에, 예수의 평화가 이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고 했을까?  이 사실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예수는 어떤 세상을 살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무릇 역사적 사실과 사건에 대한 이해에는 상관적-상황적 해석방법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로마제국의 식민통치 아래 살았다. 그의 나라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로 하여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온갖 고통을 겪어야 했다. 작은 봉기라도 일어나면 그 지역 사람들을 깡그리 몰살하거나 노예로 끌어갔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민족공동체는 거의 문어져버렸다. 세계패권주의를 지향한 로마제국의 식민지통치방식은 '칼'이었다. 로마제국은 칼의 힘으로써 세계를 재패하려했는데, 그것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이른바 '로마의 평화'(pax Romana)다. 칼의 힘으로써 세계의 평화를 이루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평화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전쟁만 없으면 '편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겉으로는 평화인 듯 보이지만, 안으로는 냉혹한 반목이 도사리고 있다. 약한 쪽에는 온갖 불의와 불평등에서 오는 수난이 그칠 날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평화는 진정한 평화일 수가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엔 아메리카제국이 '로마의 평화'를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방법은 그보다 더 악랄하다. 칼[핵무기]와 함께 돈[시장]으로 세계를 재패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라 부른다. 우리나라는 지금 남북 가릴 것 없이 아메리카제국의 패권주의에 시달리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 겨레의 평화통일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히브리[이스라엘]사람들은 일찍이 평화의 개념을 달리 했다.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평화가 아니라, "[야훼의] 정의가 실현된 상태"가 진정한 평화라는 것이다. 나라 안에서는 다윗이나 솔로몬과 같은 전체주의적 왕권체제에 의해서 온갖 괴로움을 겪어본 적이 있는, 그리고 나라 밖 힘센 나라들에게는 침략을 당하여 노예 살이에 시달려온 이스라엘민족에게는 정의가 실현된 상태인 평화사상은 너무나 당연하다. '[야훼(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된 상태', 이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샬롬'(Shalom)이라고 불렀다.
예수의 평화가 "이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고 했을 때, 아마도 그 평화는 '샬롬'을 가리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예수는 이스라엘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유대교도의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사람으로서 대접 받지 못한 가장 천한 계층(목수였거나 농민이었거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천민들이야말로 야훼의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세계를 더욱 바라지 않았겠는가. 

3.
그러나 문제는 예수의 평화가 '샬롬'에 그쳤느냐에 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이 내세운 야훼의 정의는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에 바탕하고 있어서 철저한 배타성을 지니고 있다.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에 따르면, 이스라엘민족이 원주민을 침략하고 정복하는 것은 정의가 되고, 이스라엘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침략을 당해 정복을 당하면, 그것은 불의가 된다. 야훼의 정의 여부가 이스라엘민족을 중심으로 규정된다. 이것은 마치 파스칼이 그의 팡세(명상록)에서 "정의는 강 건너편에 있다." 고 말한 것과 흡사하다. 강 이 쪽의 우리 편은 무조건 정의이고, 강 건너 쪽 너희 편은 무조건 불의이다. 이스라엘민족이 하는 일은 모두 정의이고, 이스라엘민족이 아닌 쪽에서 하는 일은 모두 불의이다. 아울러 하느님 야훼는 이스라엘민족에게는 정의의 하느님이지만, 이스라엘민족에게 침략을 받은 원주민들에게는 불의의 하느님이 된다. 이러한 '야훼의 정의(正義)'는 이스라엘이 '야훼(하느님)의 이름'으로 다른 민족을 정복할 수 있는 침략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히브리족속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에 들어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실은 '지파동맹'이다)를 세우기까지 수많은 도성을 빼앗고 원주민을 도륙했는데, 그들에겐 이것이 바로 '샬롬'의 실천으로 정당화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이스라엘나라의 정복정책에서 그대로 들어나고 있다. 이스라엘이 1948년 나라를 세울 때 현지 팔레스타인들을 무력으로 쫓아내고 삶의 터전을 파괴했는데, 그 결과 지금은 약 400만 명의 팔레스타인들이 고향에서 추방되어 방황하다가, 유엔이 정해준 난민촌에 정착하여 겨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요즈음에는 경제제재초치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난민촌 둘레에 높은 분리장벽을 쌓고서, 서로의 왕래를 막음으로써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숨통을 끊어 스스로 굶어 죽게 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지금 세계는 팔레스타인들이 살고 있는 가자지구를 "지구상에 있는 가장 큰 감옥"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은 팔레스타인 말살정책은 아메리카제국이 뒤를 받쳐주고 있어서 가능하다. 이것이 '하느님의 선민'이라는 이스라엘사람들의 후손이 내세운 샬롬의 정체이다. 샬롬이란 미명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제국주의적 침탈은 로마제국이나 아메리카제국의 그것보다 훨씬 더 악랄하다는 것이 오늘의 정평이다. 이들의 샬롬을, 우리는 '이스라엘의 평화'(pax Israelis)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스라엘의 평화'가 히브리인들의 성서[구약]에 나타난 '야훼의 평화'라면, 예수가 이러한 평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예수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자명하다. 예수의 하느님은 "착한 사람의 논에도 비를 내리시고, 악한 사람의 논에도 비를 내시는"(마태 6 : 45)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어버이 하느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해방과 정의만을 편드는 편협한 '이스라엘의 평화'(샬롬)를 어찌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예수는 이스라엘의 전통으로 받은 야훼의 평화를, 이스라엘민족에게만 적용되는 평화가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 함께 적용할 수 있는 '인류공공의 평화'로 넓혔던 것이다. 처음 그리스도교는 실권을 잡기 전에는 한때 예수의 뜻을 이어 샬롬의 세계적인 공공성을 지향한 적이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라는 생각에 따른 것이다.(바울로) 예수는 그의 하느님 야훼를 한번도 '야훼'라고 부르지 않고, 다만 '아버지'(abba)라고만 불렀는데, 그것은 이른바 '야훼의 평화'에 대한 거부를 시사한지도 모른다.

4.
그렇다면 예수가 말하는 평화는 무엇이었을까? 요한복음서저자가 예수의 평화는 "이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헬레니즘에서 말하는 '마음의 평정'(ataraxia, apatheia)에 그 초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흔히 말하는 '내면의 평화' 곧 '마음의 평화'가 예수의 평화라는 것인데, 이것은 요한복음서의 평화사상이 헬레니즘의 신비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내가 너 안에, 네가 내 안에" 있는 하나임의 상태가 진정한 평화의 자리일 수 있다. 역사의 예수에 정통하고 있는 미국의 "예수 세미나"에서는 예수를 그리스의 견유(犬儒)학파 사람들과 비슷한 '떠돌이 현자'로 보는데, 만일 그렇다면 예수의 평화는 '개처럼' 자유롭게 사는 정신의 평화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가 가르친 '지혜'는 사회적 혁명이 골간을 이룬다는 사실이다.(크로산) 그리고 '마음의 평화'는 오늘날까지 그리스도교의 평화 곧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의 알짬으로 이해되고 있다.   
우리가 역사의 예수에게 주목한다면, 예수가 생각한 평화는 '이스라엘의 평화'(샬롬)에 그치지 않고, 또한 요한복음서에서 말하는 '마음의 평화'만도 아닌 것이 확실하다. 예수는 그의 평화 사상을 따로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그것을 우선 '예수의 평화'(pax Jesu)라고 부르기로 한다.

5.
예수의 평화는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는 그것을 그의 하느님나라 메시지와 그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는 궁극에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세계를 뜻한다. 예수의 하느님나라를 그 때의 역사적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해석한다면, 정치적으로는 이스라엘민족이 로마제국과 그의 대리 통치자들(헤로데왕과 예루살렘성전의 지배자들)의 억압과 착취로부터 벗어나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세계를 가리키고, 경제적으로는 '힘닿는 대로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가지는' 경제적인 평등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세계를 가리키고, 종교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전통과 율법의 예속에서 벗어나 그 주체로서 살 수 있는 세계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침략으로 무너져버린 이스라엘공동체의 회복과 직결된다. 그것을 시체말로 나타내자면,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가 실현된 세계'와 다르지 않다. 진정한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가 실현된 세계, 그게 다름 아닌 예수가 외친 하느님의 나라의 골자이며, 예수가 바랐던 세계였다.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 예수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싸우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예수는 말했다.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 : 34) 루가복음서에는 "칼을 주러 왔다"는 말 대신에 "분열을 일으키려 왔다"(12 ;51)고 적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예수는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루가 12 : 49)고도 말한다. 이 말들은 사회개혁이나 역사변혁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팍스 로마나'나, '이스라엘의 평화', 그것은 모두 '예수의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따위 평화는 도리어 싸워야 할 대상이다. 예수는 그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게 다름 아닌 그가 벌인 '하느님나라운동'이다. 예수는 말했다. "하느님의 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힘을 쓰는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한다."(마태 11 : 12) 예수는 마침내 하느님나라운동으로 하여, 로마제국이 항로마투쟁에 나선 이스라엘의 '정치범'(국가범)에게만 적용했던 십자가형틀에서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생명평화결사'라는 말에서, 이러한 예수의 결의와 태도를 읽는다면 지나친 것일까? 

6.
사람들은 흔히 예수를 '평화주의자'라고 말한다. 예수를 '무저항주의자'라고도 말한다. 예수는 "오른 편 뺨을 치러들면, 왼 편 뺨을 돌려대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이 말의 본뜻은 저항을 거부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비폭력의 저항'을 권유한데 있다. 돌려댄 외편 뺨을 차려면 왼편 손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유대나라에서는 관례상 왼손을 쓰는 것은 불법이다. 그래서 결국 상대의 오른 뺨을 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폭력을 쓰지 않고 저항하는 비폭력의 저항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준다고 하여라." 이 말은 로마군인들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데, 로마군인들이 이스라엘 사람을 붙들어 짐을 지우고 오리를 가자고 강요하면 십리까지도 가겠다고 말했을 때, 로마군인의 강요를 뿌리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오리 이상의 거리를 가면 그 당시 로마군법에 저촉이 됨으로, 로마군인이 짐 지우는 일을 스스로 포기하게 할 수 있다. 이것 또한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어서 스스로 폭력을 쓸 수 없게 만드는  '비폭력의 저항'의 한 방법이다.      
그러나 예수의 저항방법이 비폭력의 저항에만 그쳤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보았듯이 예수는 스스로 하느님나라 곧 평화의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대들어 싸웠으며,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종용했다. 예수는 '평화의 세계'를 이루기 위한 철저한 저항자였다. 예수의 '성전숙청사건'이 그것을 단적으로 뒷받침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해방절인 '유월절'에 예루살렘성전 안으로 쳐들어가, 채찍을 휘둘러 제물(祭物)을 파는 사람들과 돈을 바꿔주는 사라들을 내리치고 그들의 상을 뒤집어엎었다. 하느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어떤 민중신학자는 이 사건을 '민중봉기'로까지 확대 해석한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도 예수의 혁명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는 예수가 폭력적인 저항방법을 정당화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저항하는 방법은 사건의 사안에 따라서 그 때 그때 선택-결정해야 하는 과제로 남겨두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독일 나치시대에 경건한 목사였던 신학자 본 훼퍼가 히틀러 암살에 가담했던 탓으로 처형되었는데, 그가 폭력에 호소해서 '살인행위'에 가담했던 일에 관해서 우리는 이러 쿵 저러 쿵 말할 게재가 아니다. 그가 폭력적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에 관해서는 본훼퍼 자신만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비폭력의 저항방법을 원칙으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하등의 이의가 없다.
그런데 비폭력의 저항은 폭력의 저항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목숨을 내댄 데는 차이가 없지만, 비폭력의 저항방법은 그가 당한 폭력에 대해서 많은 인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폭력의 저항방법은 엄청난 용기와 자신과 긍지를 가지게 한다. 함 석헌의 말마따나, 비폭력의 저항은 '이미 이겨놓고 하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비폭력적 저항은 '폭력'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항'(싸움) 그 자체에 초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예수를 빌어 '세계평화주의'를 함부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스도교가 처음 시작되면서 헬레니즘사상 특히 스토아철학의 세계시민주의의 영향을 받아 이른바 '사해동포주의'를 표방하고 나섰다.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딸과 아들로서, 하느님의 평화를 다 함께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공인을 받으면서 '로마의 평화'를 본받아, '그리스도교의 평화'를 내세우면서 세계 공공의 평화를 세계재패에 악용했다. 천주교나 개신교 할 것 없이, 그리스도교가 2,000년에 걸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죽인 사람의 숫자가 2억 이상으로 추산된다. 적대자들에게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인들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지금까지 세계평화를 망가뜨려온 주범이었다는 사실을 강변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람살상행위는 아직도 더욱 강화되고 있다. 아메리카제국은 그들의 국익을 중심으로 설정한 '악의 축'의 나라들에 대해 노골적인 침략-정복정책을 펴고 있는데, 이것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메리카제국의 패권주의를 뒷받침하고 있는 집단은, 바로 그리스도교 보수주의자들을 비롯한 다른 종교 보수주의자들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보수교회신앙인들은 한 술 더 떠서, 겨레의 평화통일을 거부하는 데 극우세력과 야합하고 있다. 북녘을 주적국가로 규정하고 이를 말살하려는 정복이데올로기인 국가보안법의 패지를 극력 반대하고 있는 것이 이를 실증한다. 오늘의 한국보수교회에는 세계의 평화는커녕 겨레의 평화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 사실이 요즈음에 와서 극명하게 들어나고 있다. 남북정상이 만나는 며칠 전에 이른바 '유력하다'는 국내외 한국인 보수극우목사 70명이 모여 남북정상회담에 사실상 반대하는 성명서를 냈다. 한국교회 그리스도교가 역사의 예수에게서 참된 하느님의 평화가 무엇인가를 배우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겨레의 자유와 평화통일을 기대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뀌어가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진정으로 남북의 평화통일과 세계의 평화를 이루는데 참여하려면, 예수에게서 평화의 참뜻을 배우고,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따르고, 나아가 독선-독단의 배타주의를 넘어서 다른 종교와 함께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7.
우리가 예수의 평화를 묻는 것은, 우리 겨레가 남북의 평화통일의 이념을 묻고 실현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예수의 평화는 우리 겨레의 평화통일 이념을 실현하는데 하나의 '전거'(典據, 패러다임)가 될 수 있다는 전제에서다. 예수는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평화의 세계 곧 하느님의 나라를 지향했다. 북녘은 인민들이 먹고 살만한 평등의 세계를 실현하고, 남녘은 민중들이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계를 실현해서, 마침내 통일된 평화의 나라를 이루어낸다면, 우리나라는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는 '역사의 기틀'이 되어, 인류사에 '동방의 빛'으로 크게 이바지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예수가 지향했던 '오늘의 하느님나라'가 아니겠는가?
남북평화통일의 실현은 우리가 오랜 세월 '분단모순'으로 하여 겪어온 민족적 수난을 값있게 승화시키는 역사적 과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진정한 평화의 나라,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힘쓰는 방법이야 어떻게 표출되든, 모든 반평화세력에 대한 저항활동에,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루가 10 : 27) 온몸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누구나, "하느님의 나라[평화의 나라]는 힘쓰는 사람이 차지한다."는 예수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생명평화결사』에서 내고 있는 격월간지『등불』(2007, 7-8)에 실린 것인데, 조금 보태고 손질했다.

Trackback 0 Comm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