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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0 10:18

예수가 외친 '하느님 나라'의 뜻(하)

<신학비평 주간 > 송기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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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느님 나라의 종교적 의미

예수의 하느님나라가 지닌 종교적 의미는 모든 민중이 온갖 종교지배이데올로기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서, 그것의 주체가 되는 세계를 의미한다.

예수가 가장 날카롭게 대들었던 대상은 유대교의 지배이데올로기였다. 예수는 유대교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유대교가 성전종교로 굳어지면서 여러 가지 지배이데올로기로써 민중을 억누르고 짓밟게 되었을 때, 그는 거기에 도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대교의 권력중심이 예루살렘성전중심체제로 모아지면서 먼저 내놓은 이데올로기는, 하느님은 예루살렘성전에만 있으므로 여기에 와야 비로소 하느님께 속죄제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체제의 실세들이 하느님을 독점해서 세도를 부리고 이권을 챙기자는 수작이었다. 초월의 하느님이 어떻게 한정된 공간에 갇힐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는 이 종교지배이데올로기에 도전했다. "하느님께서는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예배를 드리는 곳에는 그 어디에도 계신다."(요한 4 : 23-24) 이 말은 하느님을 예루살렘성전으로부터 풀어놓으려는 하나의 '하느님해방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신에 대한 이 해방선언은 동시에 유대교 지도자들의 착취에 대한 도전과 저항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사람들[민중]이 하느님께 속죄하기 위해서는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야 하는데, 그때 반드시 바쳐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양과 비둘기와 같은 제물이다. 그것은 꼭 깨끗한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의 결정권은 사제가 가졌다. 깨끗한 제물이라도 사제가 불결하다고 판정하면, '깨끗한 제물'로 다시 사야했다. 그리고 제물을 사려면 성전에서 쓸 수 있는 돈으로 바꿔야 한다. 환전상은 차액을 남겨서 사제와 그 이득을 나누어 가진다. 이 짓들은 모두 민중을 착취하는 수단의 하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성전의 대사제는 이스라엘의 최고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을 손아귀에 넣고 행정권과 사법권을 행사했다. 또한 성전체제를 지탱하기 위한 세금징수권도 가졌다. 이스라엘사람들에게는 소득의 10분의 1을 성전세로 바쳐야 할 의무가 부과되었다. 또한 대사제에게는 이스라엘사람들의 동원권도 가졌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적어도 한 해 한 번씩 예루살렘성전에 참배해야 했다. 이스라엘 민중들이 이들에게 얼마나 억눌리고 빼앗겼는가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예수가 예루살렘성전의 실세들에게 맞서고, 예루살렘성전의 '숙청[파괴]사건]을 일으킨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또한 유대교가 이스라엘 민중들을 억누르는 데 사용했던 지배이데올로기는 '율법'이었다. 율법의 핵심은 '안식일법'이다. 안식일법이란 안식일을 어떻게 해야 잘 지킬 수 있느냐에 관한 법인데, 여기에는 무려 250조항이나 있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어느 조항 하나만 어겨도 죽을 수 있을 만큼 엄격한 법이었다. 안식일에는 병을 고쳐서도 안 되고, 물건을 옮겨서도 안 된다. 남의 손에서 무엇을 가져가서도 안 된다. 자선이나 구걸조차 금하는 것이다. 물론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안식일 법을 지키려면 적어도 하루 밥 한 끼는 걱정이 없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런데 유대교의 집권자들은 안식일법을 지킬 수 없는 까닭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안식일 법을 어기면 무조건 '죄인'으로 몰았다. 그들은 안식일법을 그물처럼 쳐놓고서 거기에 민중이 걸려들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이처럼 안식일법이 민중을 얽어매는 것을 보고서 예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지 않다. 사람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28). 이것은 예수의 '인간선언'이며, '인권선언'이다. 이 선언에서 '안식일'은 '지배이데올로기'로, '사람'은 '민중'으로 바꿔 읽으면, "모든 종교이데올로기는 민중을 위해서 있다. 민중은 종교이데올로기의 주인이다."

그리고 유대의 종교지배이데올로기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정결법'이다. 본디 이스라엘의 정결법은 몸을 깨끗하게 하고 옷을 깨끗하게 입으라는 따위 아주 좋은 전통의 위생법이었다. 그리고 정결법에는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는 방법까지 규정되어 있다. 문제는 예수 시대에 이 정결법이 민중을 얽어매는 지배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이다.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도 정결법 위반이었다. 여성의 '생리'가 정결법을 어긴다고 해서, 여성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구실로 삼기도 했다. 정결법은 생태적으로 여성을 '사람'이 될 수 없게 했다.  

예수 시대에는 안식일법이나 정결법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양치기들은 빈들에서 양떼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안식일 법을 지킬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몸에는 언제나 역겨운 냄새가 배어 있어서 정결법 역시 지킬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종교지배자들은 그들의 생활이나 생존의 조건은 전혀 배려하지 않은 채, 그들을 무조건 '죄인'으로 몰았던 것이다.        

한번은 율법을 연구하는 율법학자들과 율법을 잘 지킨다는 바리사이파사람들이 예수에게 항의한 적이 있었다. "어째서 당신의 제자들은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습니까?" 그러자 예수가 대들었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이 먹는 음식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온 것들, 이를테면 살인, 도둑질, 간음, 탐욕, 사기, 질투, 모독 따위라는 것이다. 전통을 지킨다는 구실로 하느님의 계율을 어기는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을 예수가 날카롭게 꼬집은 것이다. 예수가 바리사이파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악행을 보고, "위선자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회칠한 무덤 같은 놈들아! 화를 입어라."고 악담과 저주를 퍼부었는데, 이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예수가 '율법'에 도전한 것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약자[민중]을 보호하는 율법의 기본정신을 어기고 오히려 율법을 민중을 옥죄는 지배이데올로기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히브리사람들의 성서[구약성서]에 나타난 율법의 기본정신은 약한 계층을 보호하는 데 있었으며, 특히 안식일법의 기원은 본래 '일꾼들의 휴식'에 있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예수의 하느님나라가 지닌 종교적 의미는 "하느님은 예루살렘성전 안에만 계신다." "율법[안식일법과 정결법]은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따위의 종교지배이데올로기에 예속된 민중이 그 이데올로기의 주체가 되는 세계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이 나라의 실현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성전의 실세들에게 대들었던 것이다.


5. 그러므로

예수의 하느님나라는 그때 이스라엘사람들이 정치 쪽의 억눌림에서, 경제 쪽의 착취에서, 종교지배이데올로기 쪽의 예속에서 벗어나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를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 인간화가 실현된 세계가 다름 아닌 예수가 외친 하느님나라의 본뜻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가 예수가 바라던 하느님나라이며, 바로 이 점에 예수의 하느님나라가 지니는 오늘의 참 뜻이 있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사람답게 살고 싶어 한다. 오늘의 비인간화세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예수의 하느님나라는 그만큼 보편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묻자. 한국 그리스도교와 그 교회는 예수의 하느님나라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정치적으로, 약한 나라들을 '악의 축'으로 몰아 침략- 정복을 일삼는 아메리카제국의 세계패권주의를 찬양하고, 그들의 뜻을 따라 비민주-반통일로 역행하는 한국보수정권을 뒷바라지하고, 아직도 반공주의에 사로잡혀 겨레의 자주평화통일을 반대하고,「뉴라이트」(한국의 네오콘)의 중심에 서서「기독교사회책임」이나「기독당」을 만들어 '종교권력화'를 노리고, 생명권을 지키려는 다중의 평화로운 "촛불놀이시위"를 반대하는 보수교회집단들, 그들은 인간화를 지향하는 예수의 하느님나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게 틀림없다.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시장경제체제로 하여 빚어진 소유의 불균등(양극화)을 낳아, 가난한 계층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사람노릇'조차 못하게 하는 '돈 제일주의'에 앞장서서, '마음의 가난'(마태 5:1)을 빙자한 청부(淸富)론으로 교인들을 호도하여 치부(致富)가 곧 구원이라고 믿게 하는 따위, 교회를 물신숭배(物神崇拜)의 체제로 만드는 보수교회집단들, 그리고 종교적으로, 케케묵은 근본주의교리로써 사람들의 머리를 틀어쥐고, 교회성장제일주의를 앞세워 교인들을 휘두르고, 말씀과 권위를 얹어 헌금과 복은 비례한다고 역설함으로써 교회재정을 불리고, 그리스도교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여 나라 밖까지 나가 '공격적 선교'를 일삼는 보수교회집단들, 이들의 온갖 반예수적 행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예수의 하느님나라와는 무관한 게 분명하다. 또한 예수가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위선과 못된 짓거리에 대해서 날카롭게 꾸짖으면서 퍼부었던 악담과 저주에서, 오늘의 한국 교회지도자들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의 보수그리스도교와 그 교회에는 역사의 예수가 바라던 하느님나라는 없는 성 싶다. 

만일 오늘의 한국교회가 예수의 하느님나라를 실현하려는 의지라도 있다 면, 그 자체를 송두리째 뒤엎는 변혁을 거쳐야 할 터인데 그게 가능할까? 혹여 예수의 하느님나라가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된다면, 오늘의 한국그리스도교는 자기해체의 길로 나갈 수밖에 없을 터인데, 그건 더더욱 불가능하지 않을까? 역사의 예수와 무관한 한국의 '그리스도교왕국과 그 제왕들과 백성들',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

송기득 교수는 연세대학교와 한국신학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목원대하교 신학과 조직신학교수를 거쳤다.(1999) 지금은『신학비평』(계간) 주간으로 있으면서, 그동안 순천대학교 철학과에서「예수의 사회적 휴머니즘」을 강의했으며, 지난 학기에는 호남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역사의 예수는 누구인가」를 생애 마지막 강의로서 했다. 그는 인간화를 틀로 삼아 그리스도교를 비판하고 있으며, 역사의 예수에게서 그리스도교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인간』,『예수와 인간화』,『사람다움과 신학하기』,『그리스도교신학과 인간해방』, 『하느님의 두 아들』,『역사의 예수는 누구인가』(강의노트) 따위의 책을 썼다.

Trackback 0 Comment 1
  1. 바우로 2009/02/24 23:45 address edit & del reply

    안녕하세요. 송기득 주간님. 기독교사상에서 주간님의 신학 글을 읽으면서 예수의 하느님나라 복음이 얼마나 사회의식이 있는 말씀들인지 알았습니다.감사드립니다.